그의 조각품은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 석상처럼 서있었다

흡사 하루라도 빨리 인간이 되고 싶어 기다리고 서있는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 석상처럼 보였다

세종시 연기면 눌왕산 앞자락에 농산물 창고 같은 2층 높이의 50평 쯤 되어 보이는 건물이 넓은 마당 한 귀퉁이에 서있다. 바로 조각가 안의종교수(62)의 작업실이다.

조각가 안의종 교수62)

눌왕리에서 서당을 열고 훈장을 하시던 아버지가 물려준 500평짜리 땅에다 지은 안교수의 작업실 안에는 군데군데 작업하다 만 조각상들이 서있다. 흡사 하루라도 빨리 인간이 되고 싶어 기다리고 서있는 피그말리온의 갈라테이아 석상처럼 보였다.

“이곳이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사실 이지역이 아주 가난한 시골지역이었어요. 그중에도 저희 동네가 빈촌이었지요” 안교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 “그 때 초등 졸업생 240명 중 겨우 70명 정도만 중학교에 가고 이중에서 또 반 정도만 고등학교에 진학을 할 만큼 전체적으로 이 지역이 매우 가난한 시골동네였습니다”하면서 잠시 지난 시절을 회상하듯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국군 대전통합병원이 바로 우리 마을 옆에 있었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야학(夜學)을 개설해줬어요. 그래서 마을에서 머리 좋고 가난한 친구들이 바로 그 야학에서 공부해서 검정고시로 상급학교로 진학해 잘 된 녀석들도 많이 나왔습니다”하며 이내 환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가난한 서당집 아들이 객지에 나가 교수가 되어 다시 자기를 낳고 키워 준 고향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차렸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되기에 쉽고 평탄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조각가 안 교수는. 구멍 난 검정고무신에 보릿고개를 넘던 누구나 다 겪었던 가난하고 어려운 그 시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안 교수는 어떻게 중학교는 졸업했지만 형이 공부를 해야 하므로 어려운 집안 형편에 더 이상 학업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원치 않는 농사꾼이 되었다. 그러나 비록 두 손은 농사를 짓고 있지만 그의 미술에 대한 뛰어난 재능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미술에 소질이 많다고 선생님들이 칭찬도 하시고 말씀도 해주셨어요

“어릴 적부터 저는 미술 선생님이 꿈이었습니다” 안 교수가 다시 약간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연남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각종 미술대회에 나가 곧잘 입상을 하곤 했어요. 그래서 미술에 소질이 많다고 선생님들이 칭찬도 하시고 말씀도 해주셨어요.”하며 인상 좋은 이웃집 아저씨 같은 함박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어 “사실 그때 그림보다는 판화를 많이 했어요. 그게 재미도 있고 제가 잘하는 분야니까 더 집중도 잘되고 그랬어요.” 하며 지나간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바로 작업실 저 아래가 제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고요.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서당이기도 해요. 서당을 하실 때 어머니께서 동리 어르신 분들에게 술밥을 끊이지 않고 내어 주신 덕이 쌓여 적덕(積德)이 되었는지 그야말로 ‘개천에 용 나듯’ 제가 대학교수로 용천(龍泉)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하며 멋쩍게 웃었다. 잠시 뒤 “제가 살던 마을은 거의 다 농사 일 품앗이를 하시던 분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제가 농사를 지으면서도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었든 간에 반드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조각가에다 교수가 되어 돌아오니 마을 사람들이 전부 깜짝 놀라워하면서 엄청 반겨주셨어요”하고 말했다.

 

혼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미술이론 책들을 사다가 ‘독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안 교수가 이렇게 성공한 삶과 꿈을 이루는 과정은 사실 지난하고도 험난했다. 지금은 안타깝게 폐교가 되어 사라진 성남중학교를 다니던 안 교수는 수업시간 중에서도 특히 미술시간이 제일 재미있었다. 그런데 미술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자주 바뀌면서 안 교수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은 빛을 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더구나 미술선생님이 매 학년마다 바뀌다 보니 안 교수의 미술적 재능과 소질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안 교수는 이에 실망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을 혼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미술이론 책들을 사다가 ‘독학’에 들어갔다. 그 당시 안 교수는 유명한 조각가가 된다거나 대학교수가 되겠다는 것 보다는 학교의 미술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미술선생님은 꼭 되어야 하겠고 학교에서는 전문적으로 배울 수는 없고... 그래서 저 혼자 미술 관련 책을 구해다가 혼자서 읽고 따라하면서 독학을 시작 했습니다”하고 말하면서 “공주고에 진학하자마자 곧바로 미술부에 들어가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미술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요. 게다가 공주에 있는 버스회사에서 전적으로 미술부를 지원해주었기에 더욱 마음 놓고 금전적 걱정 없이 실컷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죠”하고 그간의 사정을 밝혔다.

 

실기대회마다 모두 입상을 하면서 휩쓸고 다녔다. 한 마디로 물 만난 고기였다

안 교수는 공주고에 재학하는 동안 경희대, 홍익대, 조선대, 원광대에서 실시하는 실기대회마다 모두 입상을 하면서 휩쓸고 다녔다. 한 마디로 물 만난 고기였다. 게다가 홍익대 출신 유명 작가 임동식씨가 공주고 출신 3명의 재능을 알아보고 여름방학 한 달 동안을 그의 작업실에서 합숙훈련을 시키며 미술공부를 시켰다. 이때 안 교수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역시 가난이 문제였다. 집안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년 만에 군대에 입대했다. 군대에서 3년 동안 영사기를 돌리는 정훈병과 차트를 쓰는 차트병 보직을 맡았다. 하지만 안 교수는 군대에서 이런저런 보직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어도 늘 그의 심장 깊숙이 자리 잡은 미술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식지 않았다. 오히려 정훈병으로 병사들에게 영화를 틀어줄 때 하얀 스크린에 비추어진 영상을 보면서 작품의 구도를 익혔고 배우들의 연기 장면에선 조각가로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표정을 배웠다.

 

충남대 미술학과에 28세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안 교수는 1983년 제대 후 2년간 농사를 지으며 재수를 했다. 손재주가 있으니 쟁기도 직접 만들었고 지게도 뚝딱하면 만들어졌다. 전쟁에서 휘둘러야 할 칼로 벼를 베고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1985년 충남대 미술학과에 28세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는 1학년 때부터 충남 미술대전, 중앙일보 콩쿠르, 한국 현대미술 대상전 대상을 받으면서 또다시 미술대전을 석권(席卷)했다. 그리고 인생의 멘토까지 만났다. 경익운수 신영철 이사, 故이은명 前 대전MBC 사장, 임치환 프로듀서, 신대현 前 건양대 총장 등이 그들이다.

“대학에서 조각을 본격적으로 조각을 전공했어요. 붓을 통하는 그림과는 달리 조각은 직접 손으로 만져서 하다 보니 감정이 직접적으로 작품에 나타나는 게 좋았습니다. 또 무거운 것을 들거나 옮길 때 동료들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혼자서 하는 예술과는 다르죠.”하고 안 교수는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때 안 교수는 불교 조각 공부를 위해 고교시절 때 2년간 절에서 머물며 구도자의 심정으로 생활했었다. 그리고 한남대 박병희 교수를 만나 심미적인 표현에 깊이를 더했다. 거기에다 대전대 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유교적 사상까지 더해져 그의 작품은 ‘절제된 표현’과 ‘심미적 표현’을 나타내는 것이 특색이 되었다.

2004년 허균 문화예술상 수상을 한 안 교수는 “형태는 많이 변하기는 하지만 본질을 잃지 않는 게 저의 작품세계입니다. 기독교로 말하면 ‘성령의 힘’이 발동하게 되는 셈이지요. 제기(祭器)를 만들 때 사사로움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게 제가 추구하는 세계입니다.”하면서 자신의 작품관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이어 “대평리는 산이 있고 고고한 반면 연기군은 백제 멸망 당시 예술인들이 숨어서 혼을 불태웠던 곳이지요. 그래서 백제미술의 혼에다 비굴하게 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셨던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의 뜻을 더해 조각을 새기고 있습니다”면서 말을 마쳤다.

현재 안 교수는 2015년에 건양대에서 나와 한밭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계속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건양대학병원 정문 조형물
작품 '우리들의 엄마'
작품 '가을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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